질서와 논리, 그리고 낯선 세계
저는 제 인생의 전반부를 두 개의 세계에서 보냈습니다.
첫 번째 세계는 물리학이었습니다. 그곳의 법칙은 완벽하게 정제된 수식으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. 거대한 행성의 운동에서 미세한 입자의 진동까지, 모든 현상은 몇 개의 단순한 방정식으로 설명되었습니다. 그 질서의 아름다움에 저는 감탄했습니다.
두 번째 세계는 프로그래밍이었습니다. 이곳은 논리의 언어로 구성된 세계였습니다. 명확한 문법과 오류 검출 시스템이 있었고, 문제는 원인을 찾으면 반드시 해결되었습니다. 잘 짜인 코드는 군더더기 없는 구조였고, 버그는 반드시 수정 가능한 범주에 속했습니다. 물리학에서 사용했던 수식들은 프로그램으로 옮기기 아주 좋았습니다. 수식들은 제가 만든 프로그램에서 살아 움직였습니다.
물리학과 프로그래밍, 두 세계는 저에게 세상을 이해하는 두 개의 좌표축이었습니다. “모든 현상에는 원인이 있고, 모든 문제에는 해답이 있다.” 그것이 제가 살아온 세계의 규칙이었습니다.
그리고 저는 세 번째 세계를 만났습니다. 바로 한의학이었습니다.
이곳에는 놀라운 치료 경험들이 비유와 상징으로 설명되어 있었습니다. 제대로 다룰 줄만 안다면 기적을 행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.
하지만 환자를 앞에 두고도 비슷한 치험례를 찾아 헤맬 뿐, 환자의 상태가 머릿속에 그려지지 않았습니다.
물리학에서는 F=ma라는 법칙이 있어서 m, a를 알면 F를 알 수 있습니다. 하지만 한의학에는 F가 뭔지, m이 뭔지 정의 내리기가 어렵습니다. 사용하는 용어들이 하나 같이 다 모호합니다. 그래서 이렇게 말하면 이런 것 같고 저렇게 말하면 저런 것 같습니다.
그럼에도 불구하고 훌륭한 한의사들은 많이 있습니다. 마치 요즘의 인공지능이 방대한 데이터를 학습해 패턴을 익히듯이,
훌륭한 한의사들도 그런 방식으로 지식을 체득하는 것 같습니다. 하지만 그런 식의 공부는 저랑은 잘 맞지 않습니다. 저는 몇 가지 현상들을 통해서 원리를 찾고 그 원리를 통해 다시 현상들을 이해하고 예측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.
그래서 저는 임상가 대신 인간이라는 시스템을 모델링하는 개발자의 길을 택했습니다.
제가 길을 잃은 이유는, 잘못된 곳에 들어섰기 때문이 아니라, 기존의 좌표계로는 이 세계를 표현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.
이제 저는 새로운 언어와 구조로 인간이라는 시스템을 다시 모델링하려 합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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